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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의 비상계엄

    윤석열 대통령이 2024년 12월 3일 22시 30분경 기습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1945년 건국 이래 지금까지 계엄령이 총 17회 선포되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선포된 계엄령은 1979년 신군부에 의해 선포된 계엄령으로 45년 전입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령이 선포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담화를 살펴보고 계엄령의 역사와 윤석열이 계엄령을 선포한 이유, 계엄령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비상계엄령의 역사

    대한민국의 계엄령은 주로 정치적 불안, 국가 안보 우려 또는 군사적 장악에 대응하기 위해 대한민국 역사상 몇 차례 선포되었습니다. 계엄령의 첫 번째 중요한 사례는 한국전쟁 중에 발생했습니다. 북한의 침공에 대응하여 한국 정부는 상황을 통제하고 내부의 반대를 진압하며 국가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1953년에 끝난 분쟁 기간 동안 계엄령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축출된 후 정치적 불안정으로 1961년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박정희 장군이 이끄는 계엄령은 질서를 회복하고 정부에 대한 군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선포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한국에서 군부의 지원을 받는 권위주의 통치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였습니다. 가장 악명 높은 계엄령 사용은 1980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전두환이 집권했을 때였습니다.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선포되고 군대가 파견되어 시위를 진압했습니다. 광주의 민간 시위대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인 광주항쟁은 수백 명의 사망자와 더 많은 부상자를 낸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운 사건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계엄령이 다시 같은 방식으로 공식적으로 선포되지는 않았지만,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군사 정부에 상당한 압박이 가해졌습니다.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는 결국 헌법의 변화와 군사 통치의 평화적 종식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은 한국전쟁(1950년), 1961년 군사 쿠데타 이후, 1980년 광주항쟁 당시 총 세 차례 계엄령을 공식 선포했습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국가가 완전한 민주 정치 체제로 나아감에 따라 계엄령은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2. 윤석열의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이유

    윤석열이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다시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비상계엄령이 무려 45년 만에 선포되었습니다.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 담화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민주당은 거대 야당으로써 탄핵을 난발하고 내년도 국가예산을 대폭 삭감하여 국정을 운영할 수 없게 만든 반국가세력으로 반드시 척결하겠다는 것이 계엄령선포 이유였습니다. 야당을 국정운영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국가전복을 꿈꾸는 반국가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윤석열이 표현하는 반국가세력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반국가 세력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짐이 곧 나라다"라고 했던 루이 14세처럼 윤석열도 자신이 곧 국가이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은 반국가세력으로써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세력이 바로 국회, 특히 민주당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국회를 봉 쇠하고 특수부대를 헬리로 수송하여 국회의사당 내에 침투시겨 여, 야 당대표와 국회의장을 체포하기 위하여 체포조를 가동하였습니다. 

     

    3. 윤석열의 비상계엄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

    윤석열의 비상계엄령 선포 직후 시민들은 빠르게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sns를 통해 집결을 독려했고 그 결과 수많은 시민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앞서 도착한 시민들은 국회의사당 정문을 통과하여 건물 앞까지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자정이 넘는 시간에 군 헬기 여러 대가 국회의사당 뒷마당에 착륙하여 특수부대등을 투입하였습니다. 특수부대는 곧바로 국회의사당 내부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먼저 도착해 있던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치며 쉽게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국회의사당 창문을 소총등으로 부수고 진입하였습니다. 의사당 내부에서는 국회 방호직원과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집기들을 이용하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치하고 진입을 저지하였습니다. 그사이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비상계엄 헤지안건을 상정하고 의결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제석인원 190인 찬성 190인으로 비상계엄 헤지 안이 국회를 통과하며 윤석열의 비상계엄선포는 법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국회의장은 "지금 이 시간부로 계엄군은 국회에서 철수하라. 더 이상 국회에 상주하면 불법이다"라는 경고에 스스로 철수를 시작하였습니다. 국회의사당에 모인 수많은 시민들은 승리의 환호를 지르며 철수하는 계엄군들에게 박수도 보냈습니다. 하지만 윤석열은 그로부터 3시간 30분이 지나서야 비상계엄 헤지를 하였습니다. 시민들은 기습적인 계엄령을 다시 선포할 것에 대비하여 국회의사당을 떠나지 않고 아침까지 자리를 지키며 "윤석열을 체포하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80년 최악의 계엄령을 경험한 시민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계엄령을 무력화하는데 큰 힘을 보탰습니다.

     

    결론

    윤석열의 비상계엄은 대한민국 국민들에 의해 6시간 만에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불과 10개월 전 영화 '서울의 봄'은 1300만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으로 80년 전두환의 역사상 최악의 계엄령을 실감 나게 묘사하였고 시민들은 불행한 역사를 막기 위하여 빠르고 슬기롭게 대처하여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이번 계엄군은 과거의 계엄군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80년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총을 쐈고 그 결과 수백 명의 시민이 숨졌지만 이번 국회의사당에 진입한 계엄군은 시민과 국회 직원들에게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국회의장의 철수 권고에 순순히 응하여 철수하였습니다. 그 결과 유혈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외신들은 실시간으로 한국의 계엄 상황을 자국으로 보도하였습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의 실질적인 이유는 김건희의 사법리스크와 정치브로커 명태균의 윤석열과 김건희의 불법적인 공천개입에 대한 폭로에 불안해진 윤석열이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87년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은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였지만 윤석열 정권 이후 다시 80년으로 돌아갔다는 생각에 대한민국의 국민들의 대다수는 이번 계엄령에 대한 생각은 분노와 수치심입니다. 대한미국 국민들의 슬기롭고 성숙한 시민의식과 높은 정치의식으로 불법적인 계엄령을 수습하고 대통령에 대한 견제를 시민들이 직접 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숙한 시민의식이 있는 한 대한민국은 잘못된 지도자에 의해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1980년 비상계엄을 시나리오로 13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서울의 봄' 2024년 비상계엄을 통해 대한민국 5천만을 잠 못 들게 한 윤석열의'서울의 밤' 이제 대한민국에서 또다시 '서울의 밤'이 발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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